신문 스크랩 289

올해 중국의 除夜(제야)

어느 한 곳에서 높이가 다른 지점으로 걸음을 옮기는 데에는 계단이 놓인다. 대개는 한 발짝씩 디뎌 오르거나 내린다. 따라서 한 걸음으로 하나의 ‘맺음’을 이룬다. 그런 의미 맥락에서 생겨난 한자가 ‘제(除)’다. 글자는 본래 궁중의 계단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각 단(段)을 한 걸음씩 바꿔 딛는 계단 위 동작으로 인해 나중에 ‘바뀜’의 의미를 얻었다. 아울러 이전 것을 뒤로하고 새것을 디딘다고 해서 ‘없애다’는 새김도 획득했다고 본다 이 흐름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가 제야(除夜)다. 한 해 마지막 밤을 일컫는 말이다. 가는 해와 오는 해의 교차점이 걸음 바뀌는 계단처럼 여겨져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제석(除夕)이라고 잘 적는다. 제월(除月)이라고 하면 가는 해의 마지막 달, 즉 음력 12월을 일..

신문 스크랩 2022.12.31

풍경이 있는 세상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밤사이 눈이 내렸습니다. 우리에게 축하를 보내는 서설(瑞雪)처럼 느껴졌습니다. 양이 많지 않아 도로 등에서는 다 녹았지만 그래도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뜰이나 산에 내린 눈은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보면서 우리 선현(先賢)들이 가르쳐준 눈의 여러 가지 덕목을 생각하였습니다. 첫째는위중(爲重)이라 하여 눈은 사람을 신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눈이 쌓이면 바깥 출입이 어려워져 집에 머물게 되면서 명상을 하는 등 행동거지가 신중해진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위의(爲誼)라 하여 눈은 사람들 사이에 인정을 더 두텁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눈이 쌓여 바깥출입이 뜸해지면서 서로를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위범(爲汎)이라 하여 눈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눈..

신문 스크랩 2022.12.11

축구선수의 질주

20세기 초, 이탈리아 미래주의를 이끌었던 미술가 움베르토 보치오니 (Umberto Boccioni·1882~1916)가 달리는 축구 선수를 그렸다. 색종이를 구겨 뭉쳐 놓은 것 같은 화면에 도대체 축구 선수가 어디 있단 말인가. 화면 가운데를 잘 보면 건장한 종아리와 그 아래로 이어진 발뒤꿈치가 보인다. 이 부분이 왼쪽 다리인데, 왼쪽 다리를 찾고 나면 질주하며 땅을 박차는 오른 다리가 보이고, 상체가 있어야 할 부근에서 과연 뾰족하게 구부린 팔꿈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치오니는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인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역동적인 에너지, 선수의 발밑에서 출렁이는 운동장, 그에게 쏟아지는 조명과 우렁찬 관객들의 함성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를 분할하고 윤곽선을 파괴해 날카롭게 재구성하는 피카..

신문 스크랩 2022.11.29

심정지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겪은 다섯 가지

‘사경(死境)을 헤맨다(hover between life and death)’는 말이 있다. 생사 기로에 처해(stand at the crossroads) 죽음 문턱 오가는(linger on the verge of death) 경황을 말한다. 심정지(心停止)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be rushed to the emergency room) 경우도 그렇다. /일러스트=최정진 미국 뉴욕대 의료진이 25년간 사실상 사망 상태로 실려 왔다가 되살아난(come back from the brink) 심정지 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다섯 가지 사실이 관찰됐다고 한다. 죽기 직전,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는(flash before your eyes) 옛말도 그중 하나였다. 심정지(cardiac arrest)는 ..

신문 스크랩 2022.11.29

사회를 좀먹는 벌레

도교(道敎)에서는 인간의 몸속에 기생하며 인간의 생장(生長)과 건강을 해롭게 하는 벌레가 세 마리 있다고 한다. 이를 ‘삼시(三尸)’라고 하는데, 이들은 서식하는 부위의 병을 일으키고 숙주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나쁜 마음을 먹게 만든다. 상시는 두부(頭部)에 자리를 잡아 재물을 탐하게 하고, 중시는 몸통을 떠돌면서 식탐을 돋우며, 하시는 하체에 머물면서 색욕을 불러일으킨다. 삼시는 원전에 따라 삼시구충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교에서는 이들의 폐해를 막기 위해 경신(庚申) 날에 맑은 정신으로 밤을 새우는 ‘수(守)경신’이라는 의식(儀式)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기생충 악행설은 전근대 동아시아인들의 신념 체계에 자리 잡은 전통 속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속설이 언어 습관으로 이어져서 마음 씀..

신문 스크랩 2022.11.18

웃기는 아들

연극하는 아들 걱정하는 부모님께 “언젠가 웃게 해드릴 것” 다짐 임종 못한 아버지 빈소서 정장 마련 못해 꽉 끼는 옷 빌려 입고 사십구재선 실수로 남의 큰 옷 입어… 눈물 짓던 어머니도 빵 터져 내가 연극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많이 당황했다. 나는 원래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었다. 그런 내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주로 코미디를 연기한다니. ‘누군가한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가, 어떻게 누군가를 웃길 수 있지?’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두 분의 눈빛은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언젠가는 꼭 두 분을 웃겨드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공연에 쉽게 부르지 못했다. 극단을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자신이 없었다. 수..

신문 스크랩 2022.10.25

성기사(省其私)

논어’ 위정 편에 사람을 깊이 살피는 법이 제시되어 있다. 성기사(省其私)가 그것이다. 사람이란 남들이 다 지켜보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삼가고 조심하기 때문에 그 본모습을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사사로운 점을 포착해 그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본심을 알아내려는 시도가 즐겨 사용되었다. 성(省)이란 글자를 뜯어보아도 사소한 것[少]을 들여다본다[目=視]는 뜻이다. ‘장자’ 열어구(列禦寇) 편에는 공자가 말했다는 구징(九徵)이 나온다. 성기사를 하기 위한 아홉 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을 시험할 때는 먼 곳으로 심부름을 보내 그 충성심을 살피고, 가까이 시종하게 하여 그 삼감을 살피며, 번거로운 일을 시켜서 그의 재능을 살피고, 갑자기 질문을 던져 그의 지혜로움을 살피며, 갑자기 약속을 해서 ..

신문 스크랩 2022.10.20

세종대왕의 생생지락

생생지락(生生之樂) : 생업에 종사하며 삶을 즐기다.  "시골 마을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영구히 끊어지도록 하여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세종임금의 통치 철학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이른 말이다. 이 말은 본래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로, 중국 고대왕조인 상(商=은,殷)나라 군주 반경(盤庚)이 “너희 만민(萬民)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하며 즐겁게 살아가게 만들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꾸짖음을 들을 것이다.”라고 말 한데서 유래했다.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면, 그것을 통하여 즐거움이 저절로 들어온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지는 않는지? 수많은 꽃들도 모두 장미가 되기 위해서 피지 않는다.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신문 스크랩 2022.10.17

무례(無禮)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禮)를 지키며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예(禮)라는 말은 웃어른을 존경하고 따르며 아랫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며 그 인격을 존중하는 등 일상에서 지켜야할 도덕률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늘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살아야한다. 지위가 높거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 오만하거나 무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전 대통령이 '...대단히 무례(無禮)하다'는 말을 하셨다는 보도에 높으신 분들이 이를 놓고 설왕설래 언쟁이 대단하다. 신문에 예(禮)에 관한 이런 글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예(禮)에는 크게 두 가지 용례가 있다. 행례(行禮)라고 할 때의 예는 예법이나 에티켓을가리킨다. 가례(家禮)나 상례(喪禮)가 그것이다. 반면에 지례(知禮), 예를 ..

신문 스크랩 2022.10.06

바람을 나타내는 한자

올해는 가을 초입에 대형 태풍으로 나라의 근심이 컸다. 거센 바람의 대명사로 통하는 태풍의 한자는 ‘颱風’이다. 颱는 자전에 ‘태풍 태’로 풀이되어 있을 정도로 태풍 외에는 사용례가 없는 독특한 문자다. 태풍은 사실 그리 오래된 말이 아니다. 근대 이전에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구풍 (颶風)’이라고 불렀다. 태풍이라는 용어가 보급된 것은 1920년대 이후다. 일본의 국가 예보 체계를 설계한 기상학자 오카다 다케마쓰(岡田武松)가 중앙 기상대장(지금의 기상청장) 시절 북서태평양 열대성 저기압을 부르는 국제적 명칭인 ‘타이푼(typhoon)’의 어원과 발음을 고려하여 후젠, 타이완 등 남중국의 지역어로 사용되던 颱風(일어 발음 타이후)을 정식 기상용어로 정착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로 세차게 몰아치는 거..

신문 스크랩 2022.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