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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장자, 비희(贔屭)

highlake(孤雲) 2024. 2. 16. 14:55

 

음력설이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갑진(甲辰)년 청룡의 해가 시작되었다.

한중일은 ‘용 문화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용을 특별한 존재로 대한다.

용 하면 출세를 떠올리는 것도 이러한 문화권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출세를 위해 통과해야 하는 어려운 관문을 ‘등용문’이라고 하고,

열악한 환경을 뚫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개천에서 용 나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용에게는 아홉 자식이 있다는 ‘용생구자(龍生九子)’ 전설이 있다.

이들은 전통 사회의 관혼상제나 문학, 건축 등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기능하였고, 현대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중에 비교적 잘 알려진 용자(龍子)는 맏이에 해당하는 ‘비희(贔屭)’다.

외모는 거북을 닮았고, 등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을 마다 않는

성격으로 묘사되는 이 영물(靈物)은 예로부터 비석을 떠받치는

비좌(碑座)의 상징물로 애용되었다.

‘귀부(龜趺)’라 부르는 조형물은 단순한 거북이 아니라 비희를 형상화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귀부 양식이 한·중보다 한참 늦은

에도 시대에 비로소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를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에서 접한 능(陵)이나 사찰의 비석 양식이 참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때부터 비희의 존재감이 꽤 높았는지 언어에도

그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贔屓する(히이키스루)’라는 표현은 어떠한 대상을 특별히 애용하거나

응원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贔屓の引き倒し(히이키노히키타오시)’는 감싸고돈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그 대상을 곤란에 빠뜨린다는 뜻의 관용구다.

 

전설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용의 자식들은 용이 되지 못한다(龍生九子不成龍).

인간사에서도 모두가 용과 같은 출셋길을 걸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용은 되지 못하더라도 비희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짐을 짊어진 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겠다는

소박한 꿈으로 갑진년 각오를 다지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한다.

<조선일보 오피니언(신상목의 스시 한조가)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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