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모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이기철

highlake(孤雲) 2018. 4. 9. 09:51

꽃 그늘에 앉아보렴/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의 봄비/김해화  (0) 2018.04.18
이 꽃잎들/김용택  (0) 2018.04.14
치마/문정희  (0) 2018.04.06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0) 2018.04.05
할미꽃 이야기/최소라  (0) 2018.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