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도(道)란 무엇인가?

highlake(孤雲) 2023. 4. 2. 12:51

도(道)란 무엇인가?

 

道란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그 증거를 확실하게 규명하고 밝힌 사람은 없다.  

 

노자(子)의 <도덕경(道德經)> 제1장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를 도라고 했을 때는 이미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 지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이에게 들어맞는 (진정한) 이름은 아니다. 즉, 도(道)라고 말하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고, 명(名)이라고 불리는 명은 참된 이름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道)’는 깨닫기 전의 사람에겐 단지 추상적인 말일 뿐이다. 중국의 노장사상(老莊思想)에서는 ‘만물을 만들어 내는 모체(母體)로서의 실재(實在)이며 만물을 존재케 하는 법칙’이라는 뜻으로 도(道)라는 말을 사용했다. 불교를 중국에 소개하고 경전을 번역하는 스님들은 바로 이 노장사상에서의 ‘도(道)’라는 용어를 불교 내에 흡수했다. 그 후 선불교(禪佛敎)가 크게 일어나면서 깨달음에 대한 모든 것은 도(道)라는 말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도(道)’라는 말 자체가 이미 어떤 꾸밈을 배제한 특수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송강 스님>

 

도(道)!

이 도에 대한 재미있는 선문답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 스님께 한 스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도(道)란 어떠한 것입니까?”

“도는 도(道), 곧 길이다.”

“그럼 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길? 길은 저 담장 밖에 있지.”

“아니, 누가 그런 길을 물었습니까?”

“그런 너는 무슨 길을 물었느냐?”

“큰 도, 대도(大道)말입니다. 대도.”

“아, 큰 길은 장안으로 통하지.”

 

결국 질문한 스님은 화가 나서 가버렸지만, 조주스님의 답이 맞는 말입니다. 길은 담장 밖에 있고, 큰 길은 수도 장안(시안시)으로 통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도인들은 허례허식이 붙지 않는 참된 말을 합니다. 이 참된 말이야말로 도인들의 일구입니다. 조주스님께서 ‘담장 밖에 있다.’고 하신 것은 문자 그대로 담장 밖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문한 스님은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께 여쭈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가리고 선택함을 꺼린다’고 하니, 어떤 것이 가리고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온 우주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니라.”
그 스님이 말씀드렸다. “이것도 역시 가리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조주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놈아! 어느 곳이 가리고 선택하는 것이냐?”
그 스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道)는 자유로운 삶인 것이지, 기억해서 아는 지식이 아니다. 도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러니 밖에서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도에 대한 표현을 많이 외우고 있다고 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조주선사께 질문을 한 스님은 도(道)의 실체에 접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가리고 선택하지 않는 도인의 경지’를 여쭈었다. 조주스님은 ‘오직 스스로 이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고 아주 멋진 답을 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여전히 분별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을. 괜스레 아는 체했다가 조주선사의 말에 얼이 빠져 버렸다.

 

「무명 전지지시 유명 만물지모(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없는 것이 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 (곧 사물)이다. 즉,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 이니 따질 수 없으나,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상무욕이관기묘(故常無以麒基妙), 상유욕이관기교(常有慾以觀儌)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사물의 형상을 보게 된다. 즉, 욕심이 없어야 태초의 신비한 원리를 볼 수 있고, 욕심이 있으면 진실을 못 본다는 말이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선사가 젊었을 때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에게 물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니라.”

“그렇다면 평상심을 어떻게 유지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이나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나가는 것은 도에 어긋나느니라.”

“그렇지만 방법을 모르고 어떻게 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도(道)는 아는 데 속하지도 않고 모르는 데 속하지도 않는다. 알았다 하면 그것은 곧 망상(妄想)이요, 모른다 하면 무기(無記)니 만약 참으로 도를 통달하면 마치 태허공(太虛空)이 확 트인 것과 같거늘 어찌 시비할 게 있겠는가?”

 

조작이 없는 평상심이 도라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멀리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들지 않고 스스로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기의 모습이다. 그런데 평상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늘 하루하루 반복되는 마음을 평상심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평상심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망상심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 일음일양위지도(一陰一陽謂之道)라고 하였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중용(中庸)에는 ‘성품(본성)을 그대로 행하는 것을 도라 한다〔率性之謂之道〕’고 하여 도(道)를 정의(定義)하고 있다.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는 ‘無心卽便是行此道(무심즉갱시행차도) 마음 가운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심의 경지’를 도(道)라고 했다.

 

도(道)는 별 것이 아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잘 자는 것이 도(道)이다. 음과 양은 각각 절반씩인데 그 중 하나가 없거나 모자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 않는다. 음양이 가장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은 잠이다. 어찌 잠을 제대로 안 자면서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도(道)는 전생과 내생을 보고, 타심통을 얻고, 미래를 예측하는 등 도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도(道)는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 되어 순간 순간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저녁에는 그 어떤 망상(妄想)도 피우지 않고 잠을 푹 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道)는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게 잘 살도록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다음 게송을 감상해 보자.

 

春有百花秋有月 춘유백화추유월

夏有凉風冬有雪 하유량풍동유설

若無閑事掛心頭 약무한사괘심두

便是人間好時節 편시인간호시절 <무문관의 저자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46)>

 

봄에는 온갖 꽃 피고 가을엔 달이 밝아

여름엔 시원한 바람 겨울엔 흰 눈

만약 부질없는 일에 마음 매이지 않으면

사람 사는 일 언제나 좋은 것이다.

 

봄에 꽃이 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도(道)가 작동되지 않는 죽은 사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