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스크랩

우리, 살아 있잖아요

highlake(孤雲) 2022. 7. 21. 14:46

지혜와 경륜, 게다가 넉살까지 갖춘 ‘할머니 친구’를 사귀는 건 즐겁고도 든든한 일입니다.

두 어머니가 계시지만, 딸이고 며느리라 오히려 털어놓지 못할 고민을 ‘할머니 친구’에겐

무람없이 할 수 있거든요.

 

‘홍대 앞 할머니’가 그런 분입니다. ‘대모’라기엔 체구가 귀여운 소녀 같고, ‘멘토’라기엔

좀 딱딱해서 그냥 서로 존대하며 친구처럼 지냅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 우정! 예전엔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다 카톡이 생긴 뒤로는 매주

한두 번 문자로 안부를 전하지요. 언제나 그렇듯 제가 푸념하고 그분은 다독여주시고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큰애 군대 보낼 때도, 나이 쉰에 맹장 수술 했을 때도 특유의 짧고

담백한 문장으로 절 응원해주셨지요.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한 성품인데도 위트가 뛰어나 저를 빵 터지게도 합니다.

지난주엔 수학자 허준이 얘기를 주고받다 웃었지요. “우리 수학은 가르치는 게 문제 있어요.

저도 수학 시간에 딴짓 하다가 걸려 선생님이 백묵을 슝~ 날린 적 있지요.

‘이놈들아, 나중에 계를 하더라도 빵꾸는 안 내야 되잖아!’.”

아주 가끔 속내를 드러내실 때도 있는데 그 방식이 우아해요.

얼마 전 함께 살던 딸네 가족이 미국으로 가게 돼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했는데 카톡에

이렇게 쓰셨더군요. “공항에서 오는 길, 나도 남편도 아무 말 안 하고 창밖만 내다봤어요.

‘결혼시키고 올 때가 꿈 같네’ 하자, 남편이 ‘꿈이지’ 그래요. 집에 와서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문을 잠그고 우는지 안 내려오더라고요.

헤어지고 만나고… C’est la vie(세라비), 그게 인생이죠.” 지난주엔 이러저러 속 끓는 일로

제가 또 시시콜콜 불평을 이어가자, 단 한마디로 정리해주시더군요.

“다 잊어버려요. 우리, 살아 있잖아요!”

       
  -조선일보 아무턴 주말 (김윤덕의 아무턴 줌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