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을 지났을 때다.
한 형제가 주일예배를 드린 후 찾아왔길래 반가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우리가 얼마나 찾고 기다렸는데.
사고로 다치지는 않았나 했어요.”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잘 지내다 왔습니다.”
멋쩍은 표정이다.
낯빛을 보니 평소와 달리 얼굴은 붓고, 해를 못 본 듯했다.
내가 물었다.
“큰집 다녀왔어요?”
“그렇게 됐습니다. 거리에서 별것 아닌 다툼이 있었는데, 경찰이 왔습니다.
파출소 가보니 벌금 밀린 게 확인돼 100일간 들어갔다가 왔습니다.”
내가 어깨를 치며 말했다.
“이젠 속 시원하겠네, 짐 다 털어냈으니! 하루에 얼마씩이었어요?”
“10만원입니다.”
“그동안 사람 값 많이 올랐네! 하루 10만원씩이나 쳐주니. 먹고 입고 자고,
하루 10만원씩이면 많이 벌었네요.” 우린 함께 웃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거기 춥지는 않았어요.”
“이젠 거기도 좋아졌습니다.”
“겨울 잘 지냈네요. 이제 더 털어낼 것 없어요?
더는 과거가 갈 길을 붙잡지 않아야지.”
“없습니다.”
“그러면 됐네. 100세 시대인데 앞으로 삼사십 년은 더 살 텐데,
앞으로 실컷 잘살면 되지요.”
그는 수년 전 평창 공동체에 들어와서 농사일과 건축일도 도왔던 형제다.
당시 허리가 아파서 다시 서울로 갔다.
가벼운 일을 하며 자립 생활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디 가벼운 일로 생계를 유지할 일거리가 있겠는가?
어느 사업체든 인건비보다 더 수익이 나야 업체가 유지되는 법.
그는 결국 일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다.
지난해 여름 폭염 중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몸도 살이 쑥 빠진 채
교회 세탁실에 빨래를 하러 왔었다. 더 건강해 보였다.
“허리는 좋아졌나봐요?”
“예, 리어카로 폐지를 수집해서 팔아요. 리어카를 끌며 종일 걸으니,
허리가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내가 물었다.
“하루 폐지를 모으면 얼마나 벌어요?”
“삼사만원입니다. 종일 걷는 게 좋습니다. 마음도 편하고 몸도 좋아졌습니다.”
“길거리가 위험한데요. 얼마 전 폐지 모으시는 할머니가 교통사고 당했잖아요.”
“저도 압니다. 안전하게 합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않아요.”
그가 거리에서 폐지 수집을 하고 있었기에 연락이 끊어지자, 우린 걱정했던 것이다.
틈나는 대로 연락을 했다. 그를 본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도 했었다.
그가 무사하니 다행이고, 지난 인생 묵은 짐 다 떨어낸 계기가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은 아닐까.
우리는 늘 이런 이야기를 했다.
행복과 성공이 따로 있을까.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남들을 의지하지 않으며, 스스로 기쁘면 행복이고
성공 아닐까. 이 세상 무슨 대단한 것 있겠나.
살면서 남들에게 해를 끼치고, 세상에 짐만 늘려 가고, 하나님 앞에 죄만 쌓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산골짜기 북향엔 지난겨울 잔설이 여전하다.
그래도 남향 비탈은 벌써 냉이와 쑥이 새싹을 틔울 듯하다.
하늘은 이미 봄이다.
세월은 마냥 가버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올
해도 새로운 날이 찾아오고 있다.
감사하다.
<조선일보 오피니언(이주연 산마루 교회 목사)에서 옮김>
'신문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냄새의 정치 철학 (0) | 2025.03.12 |
---|---|
얼굴이라는 이력서 (0) | 2025.03.11 |
트럼프가 젤렌스키 싫어하는 이유는 질투심 때문일까 (0) | 2025.02.26 |
치매 막는 노화 방지 주사 나올까 (0) | 2025.02.18 |
산분장(散粉葬) (0) | 2025.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