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꼭 절망이며 어둠일까.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에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한적한 곳에 문을 잠그고 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게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 불안한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감각이 생기는데,
그 느낌이 자기 삶의 단단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이토록 명징한 것이라면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회복 불가능한 불치의 병에 걸려 긴 고통을 그만 멈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조력 사망이 가능한 스위스의 한 단체로 향하는 여정을 지켜봤다.
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 속, 다양한 의견과 가슴 아픈 사연을 읽으며
나는 국회에서 여전히 계류 중인 ‘조력존엄사법’이 초고령화 시대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중대 이슈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전, 항암 치료로 피골이 상접해 움직이는 엑스레이 사진처럼 보이던
한 선배가 오른쪽 손에 마비가 올 수 있는 위험에도 발작을 멈추기 위해 수술을
시도하는 걸 지켜봤었다.
가족의 만류에도 발작을 멈춰야 왼손으로라도 다시 글을 써 볼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정체성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와 깊이 연관돼 있다.
단 한 달의 시간을 얻는다 해도 수술을 감행하는 사람이 있고,
항암으로 일 년을 더 살 수 있다 해도 종일 토하고 혼미해진 정신으로
누워있어야 하는 부작용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삶은 결국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이때의 선택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걸 오롯이 감당해내는 것이다.
스위스에 도착해 활기차진 한 환자가 다시 생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가족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마침내 고통을 멈추고 죽을 수 있다는 희망에 살맛이 나는 역설을 상상할 수 있겠냐고.
극심한 통증을 연장시키는 선택과 소중한 생명을 단축시키는 선택 중
어느 쪽이 더 두려운가.
정답은 없다.
다만 그 어느 순간에도 핵심은 좋은 죽음이 아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조선일보 오피니언(백영옥의 말과 글)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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