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1915~2000)
추위 견디던 참담한 회색빛 정원의 물건들이 이제 다들 제 물색을 갖추어서 치렁치렁합니다.
곧 붉은 장미가 담장을 둘러 피어나면 오월 녹음의 난만함도 붉은빛을 더해 적당히 긴장할
겁니다. 이 찬란한 때에는 뜰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 깊이깊이 숨겼던 부끄러운 일들, 모습들 다 내놓아 하늘에 보이라고 타이르듯이 봄볕은
날마다 소곤댑니다. 남북이니 동서니 하는 냉랭했던 모든 것들도 나서라는 시절입니다.
구중궁궐도 모자라 뒤뜰 독 안
의 배추김치, 그 포기 속의 미나리처럼 숨은 '나'를 봅니다.
봄볕 아래 눈썹 그림자 짙게 늘이고 생각해 봅니다. 봄볕의 그 '참다움'에 혹은 거짓도 있었을
나를 허물어야 비로소 '나'이지요.
그 허물어진 데를 가리며 서야 하는 우리 모두의 안쓰러움도 봅니다. 그나마 독작(獨酌) 고독의
친구들이 바람이며 구름이며 뻐꾸기 소리 같은 맑은 것들이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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