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스크랩

또 속았어? 어쩐지 쎄하다고 했잖아?

highlake(孤雲) 2025. 4. 5. 12:00

사람과 새로 만날 때마다 신뢰 저버리는 경험에 상처…
그래도 10명 새로 만나면 좋은 사람 9명 얻게 돼 행복
소중한 인연 찾기 위해 희망을 품고 새 만남 이어간다

 

“또 속았어? 어쩐지 쎄하다고 했잖아!”

1년 동안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다.

나를 위로한다고 찾아온 친구들도 입이 아플 것이다.

같은 말을 1년 동안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으니. 나는 또 누군가에게 속았고,

친구들은 ‘또 속은’ 나에게 ‘또 한 번’ 호통치는 중이다.

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중얼거린다. “어쩔 수가 없잖아.”

그래,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람을 정말 좋아한다.

어떤 사람이 좋아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보탬이 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널리 알리고,

내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그 사람을 열심히 소개한다.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다.

 

하지만 당연히도, 늘 행복이 이어지진 않는다.

열 명을 만나면 그중 한 명은 꼭 엄청난 반전을 선물한다.

도와달라고 해서 열심히 도왔더니, 받을 도움을 다 받고 나서 홀연히 사라진다던가,

좋은 동료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소개했더니,

그 이 사람 저 사람을 계단 삼아 새로운 이 사람 저 사람으로 훌쩍 가버린다던가,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여 모든 자료를 아낌없이 공유했더니,

그 자료만 가지고 다른 회사로 가버린다던가.

그때마다 쌓이는 상처가 일 년 내내 간다.

공연 연습을 하다가도, 밥을 먹거나 샤워를 하다가도 불쑥불쑥 한숨이 터진다.

그 사람을 좋아했던 만큼 한숨 소리도 크다.

가끔 꿈속에서 그 사람과의 좋았던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도 있다.

그렇게 잠에서 깨면 아침 내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열 명 중 한 명이었는데, 최근에는 열 명을 만나면 세 명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

차라리 조용히 인연을 끊을 수 있으면 서로에게 앙금이라도 남지 않는다.

내용을 확인하는 문서가 오가거나 변호사를 통해 그들을 대면하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심장이 요동친다. 서로에게 큰 상처와 앙금이 남는다.

우리를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들도 상처와 앙금이 남는다.

 

나는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그 사람과의 일에 대해 설명하고 고개 숙여 사과한다.

“그 사람을 소개시켜줘서 미안하다”고. 이 말은 정말 슬픈 말이다.

이 말을 하고 나면 심장이 요동치다 못해 찌릿찌릿 통증이 온다.

진정되지 않는 심장으로 종일 멍하니 있으면, 친구와 동료들은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본다. 내 손을 잡아끌고 맛있는 식당이나 시원한 술집으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또 다시 호통을 치는 것이다. “또 속았어? 어쩐지 쎄하다고 했잖아!”

나는 이번에도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가까스로 한마디를 중얼거린다.

“어쩔 수가 없잖아.” “왜 어쩔 수가 없는데?”

“왜냐면,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야만 알 수 있잖아. 그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인지.”

“뭐야? 그럼 또 그렇게 계속 새로운 사람 만나고 새로운 상처를 받을 거야?”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말을 곱씹는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다.

“그래, 나는 어쩔 수가 없어. 사람을 많이 만나고, 오랫동안 만나야만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들고 눈앞의 친구를 보며 말한다.

“내가 그렇게 너를 만났잖아.” 그 말을 하고 나니 어떤 울컥함이 올라온다.

 

나는 술잔을 높이 들고 눈앞의 친구에게 건배를 권하며 말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에 속고, 많은 상처를 받은

끝에 알게 됐어.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그럼 그 상처는 너를 만나려고 받은 거야. 너 같은 친구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기꺼이 만나고, 속고, 상처받을 수 있어.”

친구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잔을 내민다.

오래된 친구와 잔을 부딪치는 소리는 망설임이 없기에 맑고 투명하다.

우리 둘은 그렇게 건배를 하고, 아마도 그날 밤은 엄청나게 행복할 것이고,

어쩌면 나는 내일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만나고,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오랫동안 바라보아야만 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조선일보 오피니언(오세혁의 극적인 순간중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