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무모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진 것이
‘신풍(神風) 특별공격대’의 존재다.
흔히 ‘가미카제’로 불리는 이 자살 공격이 무모한 것은, 그 비인도성을 차치하더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러한 작전으로 얻을 수 있는 전과(戰果)가 그로 인해
치러야 하는 비용보다 클 수가 없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최고급 전력인 전투기 조종사를 자살 공격에 투입할수록 일본군의 전력은 그만큼
회복 불능의 손실을 입는 ‘필패의 우책(愚策)’인 셈이다.
특공 작전을 입안한 오니시 다키지로(大西瀧治郎) 해군 중장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반대하며 결사 항전을 주장한 대표적 주전파의 한 사람이다.
특공 작전이 비록 실질적인 타격이 제한적일지라도 적의 전쟁 의지를 꺾어 일본과의
강화(講和)를 유도하는 심리적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의 도착(倒錯)된 전쟁관을 보여주는 사례가 소위 ‘2000만인 특공 발언’이다.
1945년 8월 13일 어전회의에 참석한 그는 도고(東鄕) 외상에게 “일본 국민 2000만을
특공 작전에 투입하면 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마지막까지 항복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구국의 일념이라기에는 도가 지나친 망상이었다.
그의 최후는 다른 의미로 일본인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항복 선언 다음날인 8월 16일 미명(未明)을 기해 할복(割腹)에 나선다.
가이샤쿠닌(介錯人•할복자 곁에서 숨통을 끊는 조력자) 없는 단독 할복이었다.
아침 무렵에 부관과 지인들이 그를 발견했지만, 그는 어떠한 의료 처치도 거부한 채
몇 시간이나 단장(斷腸)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생을 마감한다.
자살 공격으로 희생된 대원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를 담아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이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죽음에 숙연함과 동정을 느끼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식으로 속죄를 하려했건, 그가 사지로 몰아넣은 영령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일보오피니언(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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