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 전, 암 수술을 앞둔 시어머니의 다리에 압박 스타킹을 신겨 드린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팔십이 다 된 노인의 몸을 살펴봤다.
한 끗 바람에도 바스러질 것 같은 앙상한 다리와 허벅지를 보고 화장실 변기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이어령 선생의 부고를 접한 후 읽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내 마음을 흔든 건 이 문장이었다.
“요즘엔 아프니까 밤낮 몸무게를 재거든. 시간에도 무게가 있어. 매일 가벼워지거든.
옛날에는 무거워지는 걸 걱정했는데, 지금은 매일 가벼워지는 게 걱정이야. …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걸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획 긋듯 한 번이야.”
그는 소리 내 한참을 우는 것도 젊은이의 행복이라고 말했다.
늙은 비극 앞에선 그 모든 게 딱 눈물 한 방울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혼자 걸을 줄 알았는데 지팡이나, 부축해주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나’라는 사람이 점점 옅어지는 경험을 했다고도 했다.
선생은 그것을 ‘상호성’이라 설명했지만 나는 그 모든 말에서 슬픔의 냄새를 맡았다.
사람은 죽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가며 21그램(g)만큼 가벼워진다고 한다.
21g이면 초콜릿 바 하나 정도의 무게다.
유방암 투병 중 돌아가신 엄마의 반지 무게가 21g이었다고 말한 선배 얘기가 떠올랐다.
유품이 된 21g의 반지가 엄마의 영혼이라는 그 말에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막 서른을 넘긴 나는 기뻐서 미칠 것 같고 슬퍼서 돌아버릴 것 같은 날이 많았다.
하지만 암 진단마저 ‘큰일 아니다’라며 담담히 받아들이는 시어머니를 보며 점점
가벼워지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아흔의 시어머니는 더 이상 기도문을 외우며 눈물짓지 않는다.
기도만 해도 터지던 자식에 대한 애타는 걱정을 이제 조금씩 내려놓은 것이다.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나 서서히 주먹을 풀며 되돌아가는 게 인간의 삶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조선일보 오피니언(백영옥의 말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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