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정곡 鄭瓜亭曲
고려 때 정서(鄭敍)가 지은 가요.
『고려사』 악지에 제작동기와 이제현(李齊賢)의 해시(解詩)가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말 노래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한다. 또,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노래와 함께 곡조도 아울러 표시되어 있다.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작자는 인종과 동서간으로서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아
왔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이 때 의종은 머지않아 다시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이에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작자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명종이 즉위한 해였다.
작자의 호를 따서 후세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정과정’이라 하였다.
『악학궤범』에 수록된 노래의 원문과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 원문
(前腔) 내님믈 그리와 우니다니
(中腔) 山 졉동새 난 이슷요이다
(後腔)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附葉) 殘月曉星이 아시리이다
(大葉)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
(附葉)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二葉)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三葉) 힛 마러신뎌
(四葉) 읏브뎌 아으
(附葉)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五葉)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② 현대어 풀이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더니/접동새와 나와는(그 울고 지내는 모양이)
비슷합니다그려./(그 누가 옳고 그른 것이) 아니며(모든 것이) 거짓인 줄을/(오직)
지새는 새벽달과 새벽별만이(저의 충정을) 아실 것입니다.
/(살아서 임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면) 죽은 혼이라도 임과 한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아―/(임의 뜻을)어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저 자신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간신배였읍니까)./(참으로) 過失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임께서 죄 없는 몸이라고 용서하시고 召命하실 줄 알았더니) 말짱한 말씀이었구나.
(거짓말이었구나)/(정말) 죽고만 싶은 것이여. 아―/임께서 벌써 저를 잊으셨습니까.
/맙소서 임이시어, 돌려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박병채 역)
사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 두 줄에서는 임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산에
사는 접동새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 다음 두 줄은 자기 죄가 임금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며,
참소당한 바가 허망하다는 것을 새벽달과 새벽별이 알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넋이라도 한데 가고 싶다고 하였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따지며,
임금이 자기를 버린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다 하고,
그 모두가 참소하는 무리들의 말일 따름이니 죽고 싶다고 하였다.
마지막 두 줄에서는 임이 자기를 벌써 잊었는가 묻고,
마음을 돌려 총애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제현은 이 노래를 「소악부(小樂府)」라 하여 칠언절구의 한시로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님을 생각하여 옷을 적시지 않을 때 없으니/봄철 산 속의 접동새와 같도다/옳고
그름을 사람들이여 묻지 말라/지는 달과 새벽별만은 알아 주겠지
[憶君無日不霑衣 政似春山蜀子規 爲是爲非人莫問 只應殘月曉星知].”
사설내용의 맥락을 살피면 이 노래는 신충(信忠)의 「원가(怨歌)」와 연결된다.
자기를 돌보아 주겠다고 한 임금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음을 모티프로 하여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원가」와 달리 원망보다는 하소연의 농도가 짙다.
자신의 위치를 아주 낮추고 버림받았더라도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어떤 이는 이 노래가 옛날부터 내려오던 민요인 속가(俗歌)에서 6구체 형식을 이어받아
무가적(巫歌的)인 성격을 지닌 형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정월조에 의하면 진작(眞勺)에는 만조(慢調)·평조(平調)·
삭조(數調)가 있다 하였고, 후전진작(後殿眞勺)의 이름으로도 쓰이며,
속악 조명(調名)이라고도 하였다. 진작은 ‘進酌(진작)’·‘進爵(진작)’,
즉 잔치인 주연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대동운부군옥』에 의하면 “진작에는 일(一)·이(二)·삼(三)·사(四)가 있는데,
일진작이 가장 느리고, 이·삼·사는 이에 버금한다.”라고 되어 있어 일진작은 가장 느리고,
이진작·삼진작·사진작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빨라지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진작사체(眞勺四體) 또는 진작사체사성(眞勺四體四聲)이라고도 한다.
『대악후보』에 전하는 악보를 해독하여 보면 진작 일·이·삼에는 가사를 얹어 노래를
부르지만, 사는 장단과 가락이 반으로 축소된 까닭에 가사를 붙일 수 없고,
따라서 음악만 연주하게 되어 있다. 전통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일·이·삼·사는
만조·평조·삭조 또는 만기(慢機)·중기(中機)·삭기(數機)로 쓰기도 한다.
현재의 곡조 가운데서 옛 형식을 갖춘 것에도 「영산회상(靈山會相)」중
상영산(上靈山: 긴영산)·중영산(中靈山)·세영산(細靈山: 잔영산)·가락덜이의 형식과
산조의 진양조(긴조)·중몰이·잦은몰이·휘몰이의 형식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옛 형식을 복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이·삼, 만(慢)·평(平)·삭(數), 만(慢)·중(中)·삭(數)은 다음 곡으로 내려가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복잡한 가락에서 점점 성긴 가락으로 변하는 점이 특징이다.
駐 : 이글은 망미동과 정과정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인터넷으로 檢索한 글을 옮겨온 글로서
信賴性이 檢定 된 것은 아니므로 參考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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