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스크랩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highlake(孤雲) 2024. 9. 8. 12:52

 

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조선일보 오피니언(백영옥의 말과 글)을 옮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