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가는 길
유배시첩(流配詩帖)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고두현(1963-)
고두현 시인은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이 시는 시인이 1993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품인데,
남해 노도(櫓島) 앞바다 앵강에서 만년에 유배를 살았던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을 내세워 그의 심중(心中)을 시로 읊었다.
바다에는 격랑이 일고, 얼었던 흙길은 녹지 않았고, 눈발은 마구 날리고,
귀양지인 섬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러나 김만중은 귀양살이할 곳을 “한 잎/ 꽃 같은 저 섬”이라고 여기고,
화초를 가꿀 것을 구상하고,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소설을
쓸 것을 꿈꾼다.
그리하여 스스로 섬이 될지언정 해배(解配)를 기대하지 않는다.
‘구운몽’을 통해서 썼듯이 세속적인 욕망이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고두현 시인이 쓴 다른 시 ‘늦게 온 소포’에는 남해에 계신 어머니께서
유자를 보내오면서 하신 말씀이 담겨 있다.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는 어머니의 당부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육성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일보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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