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불교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유형을 네가지로 말해 볼까 합니다.

highlake(孤雲) 2017. 6. 6. 10:22

불교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유형을 네가지로 말해 볼까 합니다.

첫째가 범부중생입니다.
범부중생이란, 어리석은 중생이란 말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을 가리켜 불교에서는 흔히 쥐가 쥐약을 먹고,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자기를 해치는 길을 살리는 길인 줄 착각하고 좇는데,
결국은 불행에 이르고 맙니다. 그 결과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되지요.

악행을 행함으로써 살아있는 다른 생명까지 해치고 그 과보로 단명과 병고라는 과보를

받게 됩니다. 또 남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으면 비난의 과보를 받게 되지요.


이런식으로 나쁜결과를 가져오는데도 어리석어서 알지 못하고 행하는 사람이
바로 범부중생입니다. 농사꾼을 비유로 들면 봄에 날씨가 따뜻하고 꽃도 피고 놀기 좋은데
어떻게 밭 갈고 씨 뿌릴 수 있냐면서 들놀이 가고 꽃놀이 가는 사람,
여름에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더운데 어떻게 거름 주고, 김을 매느냐면서
시원한 그늘에 누워자거나 물놀이 하고 노는 사람,
가을에는 다른 사람들 논밭에 곡식이 잘 익는데, 자기 논밭에는 잡초만 무성한 것을 보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범부중생 입니다.

둘째는 현인입니다
현명한 사람이란 말이지요.
한 가지 나쁜 짓을 하면 그 과보로 백 가지의 나쁜 결과를 받는 다는 것, 곧 인과를 아는

사람입니다. 현인인 남을 해치거나 손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농사꾼에 비유한다면 봄에

놀고 싶지만 가을에 수확을 위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는 사람이 부럽기는 해도 꾹 참고 더운 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김을 매고

거름을 줍니다. 그러고는 가을에 수확을 해서 처마 밑에 양식을 쌓아 놓고 행복해하지요.


그러나 현인은 봄, 여름 내내 놀러 다니던 사람이 양식을 얻으러 오면 절대로 안 줍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거둔 양식인줄 아느냐?' '나도 남들처럼 놀러다녔다면,

이 양식을 얻을 수 있었겠느냐?' '내가 일할 때 당신은 놀러 다니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양식을 나눠주지 않습니다.
남을 해치지는 않지만, 남에게 이익도 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현인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성인입니다.
불교식으로는 보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봄에 밭가는 것을 들놀이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게 하고 씨뿌리는 것이 꽃구경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서 항상 즐겁게 일하는 사람입니다.
땀 흘려 일하면 운동되 되고 일하고 나서 밥을 먹으면 음식 맛도 좋지요.

그런 식으로 봄을 만끽하는 겁니다.
여름에도 덥다고 가만히 있으면 공연히 더 짜증만 나니까, 오히려 김매고 땀을 쫙 흘린 뒤,
찬물 몇바가지로 씻으면서 그 시원함을 맛보구요.

가을에는 또 추수를 하면서 가을을 만끽합니다.


수확한 양식을 누가 와서 달라면 기꺼이 줍니다. 이것은 마치 음식을 먹고 잘 소화한 뒤,
눈 똥을 개가 와서 먹을 때,
' 이 똥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서 만든 것인데 그냥 와서 공짜로 먹느냐'고
쫓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다. 거기에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는 겁니다.
나는 이미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누렸기 때문에 그것은 찌꺼기에 불과한 겁니다.
그처럼 성인은 봄을 만끽하고 여름을 만끽하고 가을을 만끽합니다.
과보라고 하는 이 양식이 그냥 똥 같은 거예요. 삶을 살고 남은 찌꺼기 말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누가 사용해도 좋은 거지요.
이런 사람을 보살이라고합니다.

범부중생은 자기들 끼리 욕을 합니다. 저 나쁜놈, 욕심쟁이, 게으른 놈 하면서...
그러면서 자기는 범부중생이 되를 원하지요.

현인에 대해서는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다'하면서 존경을 하지요.
그렇지만 현인하고 친해질 수 없습니다. 현인을 존경은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요.
자기한테 별로 이익이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성인에 대해서는 욕을 해요. '바보 같은 놈, 저렇게 피땀 흘려 농사짓고
남 주는 바보가 어디 있어!' 하면서 말이에요.
특히 자기 가족가운데 성인이 나오면 엄청나게 욕을 하지요.
그렇지만 자기는 성인을 좋아합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니까요.
이런 사람이 범부중생이에요.
범부중생보다는 현인이 낫지만 아직 현인은 해탈로 나가지 못합니다.
흉년이 들어서 농사를 망치게 되면 현인은 범부중생보다 더 괴로워 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일하지 말고 놀걸..' 하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설령 흉년이 들어서 농사를 망치더라도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이미 자신은 사는 순간순간의 행복을 누렸으니까요.
그래서 보살은 자기도 이롭게 하고 중생도 이롭게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넷째는 깨달은 이, 곧 부처님이에요.
마치 산소를 생산해서 우리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면서도
스스로는 '내가 너희에게 생명의 그늘을 제공했다' 하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뭇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위(無爲)의 존재지요.
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게 아니라 무엇을 했다. 무엇을 베풀었다.
하는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바라는 마음이 발붙일 때가 없죠. 그러니 섭섭함도 없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없습니다. 이렇게 함이 없는 사람을 사는 사람을 선에서는 할 일 없는 자,

'도인'이라고 하지요.


맨날 노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해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도무지 자기가 부지런히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 중생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지를 무념(無念)의 상태라고 하는데, 이는 나와 중생, 나와 세상을 둘로 보지않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때 손이 얼굴을 씻겨주고는
'야, 내가 좋은일 했지? 너 모르면 큰일 날 줄 알아!' 이렇게 하지 않잖아요.
왜 그럴까요? 자기 몸이기 때문에 한몸이기 때문에 손이 얼굴을 위해 뭘 했다는 생각이

없는 거지요. 이렇게 일체중생을 다 자기 몸같이 생각하는 존재가 부처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법이 바로 이 세상은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 연관 되어 있다는 하나하나를 보면 별개 같지만 그 연관된 전체를 보면 하나일

뿐이라는 연기법 (緣起法) 이지요.

우리는 보살의 길, 부처의 길을 가야합니다.
이 세상에 속해서 살 때는 최소한 현인은 되어야 겠지요.
그러나 현인의 길은 수행자의 길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최소한 성인의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보살의 지위에는 올라야한다는 말이지요.

성인의 지위에 오르는 첫 번째 단계를 수다원(須陀洹) 이라고 합니다.
선으로 말하면 초견성(初見性)의 단계, 법의 이치를 꿰뚫어 아는 단계이지요.
비록 넘어지더라도 벌떡 얼어설 수 있는 그런 경지입니다.
그런데 불자들이 그것을 굉장히 어려다고 생각하고 발심(發心)을 잘 하지 않아요.
그러나 경전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많은 분들이 온갖 고통속에

있다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확연히 마음이 열려서 수다원과에 든 뒤, 정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미 부처님께서 길을 보여주셨으니 우리도 희망을 가지고
바른 법에 의지해서 정진해 나아갑시다.


                          <옮겨 온 글>

출처 :가장 행복한 공부 원문보기▶ 글쓴이 : 청정월(혜연)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공부(13)  (0) 2017.07.01
금강경 공부(9)  (0) 2017.06.25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법  (0) 2017.06.06
性品이 어찌 本來 스스로.....  (0) 2017.05.06
중생의 마음이 부처  (0) 2017.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