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와 비빔밥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작가는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고 썼다.
깊은 산속 절 마당에서 50대 남자가 담배를 피우다 노스님에게 걸렸다.
사찰은 금연 구역이다.
스님은 작았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위엄이 있었다.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노스님이 말했다.
“담배를 피우는구나.”
“그렇습니다.”
“끊어라. 딴 데 가서 피우란 말이 아니다.”
“이게 끊어지는 게 아닙니다.”
노스님이 그를 노려보았다.
“말을 잘하는구나. 자네가 안 피우면 되는 거야. 피우면 못 끊는 거고.”
남자는 벼락이 뒤통수를 치는 충격을 받았다.
무참해서 물러났다.
돌아가는 등 뒤에 대고 스님이 말했다.
"산은 금세 어두워진다.
조심해서 내려가라.
담배 피우러 절에 오지 마.
가서 끊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된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읽다가 모처럼
소리 내 웃었다.
혼난 남자가 김훈이다.
네가 안 피우면 끊는 거다, 라는 단순한 한마디에 더 이상 들이댈 말이
없었다고.
노스님은 고도로 응축된 단순성으로 인간의 아둔함을 까부순 것이다.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속세 중생의 괴로움이여.
이 책에서 더 오래 눈길이 머문 대목은 ‘수제비와 비빔밥’(195~200쪽)이다.
먹을 것이 모자라던 시절에 그의 가난한 어머니는 가끔씩 수제비를 만들어
식구들을 먹였다. 밀가루 반죽을 오래 치대야 수제비가 차지고 국물이 맑다.
수제비에는 어머니의 손바닥 굴곡이 남아 있었고 식감은 쫀득쫀득했다.
비빔밥을 만들 때 어머니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들과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가볍게 비볐다고 한다.
어린 김훈이 주걱을 들고 비비는 것을 거들 땐 “으깨지 말고 치대지 마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빔밥에는 흰 밥알의 존재가 한 개씩 살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나물들의
개별성이 뒤범벅되면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원칙이었다고
작가는 썼다.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손길과 비빔밥을 비비는 손길은 힘과 질감과 작동
방식이 이렇게 다르다.
막히는 도로 위에서 김훈은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불화와 적대 관계를
버무려서 서로 의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 어떠
해야 하는가 생각했다. 차 때문에 차가 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오도 가도 못 했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경박하게도 배가 고팠다.
수제비와 비빔밥, 두 손길 중에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을 읽다가) 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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