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가는 날 / 류지남
마실 가는 길은
동지섣달 밤마실이라야 제격이다
흙처럼 사는 사람들,
지푸라기같이 여린 마음들,
실없이 둥실둥실 이웃집에 정 붙이러 가는 길이다
배고프고 착한 사람들
이럭저럭 저녁 끼니 때우고
마실 나온 별들과 둥글둥글한 얼굴들
빙 둘러앉아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이야기꽃 피워내는 길이다
봄바람 일렁이는
풋가시내들은 풋가시내들끼리
남정네들은 남정네들끼리,
할미들은 또 할미들끼리
희미한 등잔불 아래
화롯불 끼고 아무렇게나 앉아
별 시덥잖은 얘기에도 일부러 배꼽 잡고 나자빠지며
'에구', '저런', '쯧쯧 워쩐댜', 추임새 넣어가며
놀다 보면 시름도 설움도
희미한 굴뚝 연기처럼 흩어져 가느니
쟁반 같은 달 떡하니 걸리는 정월 대보름날
다가와서 윷판 신명나게 놀거나
먹기 내기 화투장 돌리다 보면
겨울밤이란 언제나 토끼꼬리처럼 턱없이 짧기만 한데
아쉬운 발길,
휘영청 밝은 달빛 호위 받으며 돌아와
서러운 살붙이들 곁에 시린 몸 살그머니 뉘고 나면
생의 하늘엔 모락모락 샛별 다시 돋아나기도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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