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 그 정도 했으면 됐다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건국 후 150년간 활력 있던 朝鮮
네 차례 士禍로 보복 되풀이하다 인재 '씨' 마르고 왜란·호란 당해
지금 戰亂 맞기 전 조선과 비슷
건국 직후부터 약 150년 동안 조선(朝鮮)의 국력은 상당했다. 과학기술과 문화의
수준이 세계적이었고 군사력도 강했다. '4군-6진 개척'이란 짧은 단어 속에는 소
풍 가듯 만주(滿洲)를 넘나들던 수백 차례에 걸친 여진족 정벌의 역사가 숨어 있다.
이렇게 활력 있던 조선을 거덜 낸 것이 4대 사화(士禍)였다.
사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간신(奸臣)들이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다며 평지풍파를 일으킬 '죄(罪)'를
만들어낸다. 둘째 이런 측근을 제어해야 할 군주가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
셋째 보복을 당한 쪽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처지가 바뀌면 꼭 앙갚음했다.
사화를 정치세력 간 경쟁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화의 본질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정치 보복'이었던 것이다.
무오사화(1498년)부터 마지막 을사사화(1545년)까지의 47년간 인재의 '씨'가 말
랐다. 죽고 죽이는 복수(復讐)의 무한궤도를 돌며 안에서 어수선해진 나라의 명
줄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끊었다. 내부가 단결된 나라가 외침을
당한 경우는 별로 없다. 역사는 '나라 망치는 첩경은 끝없는 정치 보복으로 내부
뒤흔들기'라는 교훈을 던진다.
그 결정적 증거가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청(淸)의 요구대로 '대청 황제'라고 불러
줬으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정권을 쥔 척화파의 반대에
왕이 꼼짝하지 못했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세력 덕에 왕이 됐기 때문이다.
척화, 즉 오랑캐를 배척하는 세력은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야 옳다.
그런데 그들은 입으로만 척화를 했다.
대사간 윤황(尹煌)이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간언하면 그 부하들이 "전쟁을 하면
국가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윤황이 또다시 "강화도의 무기와 식량을
평양으로 보내 적을 막자"고 하면 전쟁 최고 결정 기구인 비변사가 "그렇게 하는 게
맞기는 한데 민력(民力)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억지로 시키면 내란이 우려된다"
고 반대했다.
전쟁이 싫으면 전쟁의 원인을 없애면 될 일이고,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결연히 전쟁
준비를 하는 게 마땅한데도 당시 정권을 쥔 세력은 그 반대로만 했다. 이러고도 나라
가 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이럴 때 '바른말'이
나와야 하는데 사화로 도륙이 난 선비 중에 감히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은 극소수였다.
정권이 바뀌고 7개월 동안 국민들은 전(前) 정권과 전전(前前) 정권의 핵심 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재판받는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하도 많이 봐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진다. 공직자뿐 아니라 이런저런 기업인들도 굴비 엮이듯 검찰로, 법정으로 조리
돌림을 당하고 있다. '갑질 프레임'에 얽혀 성난 민심의 돌팔매를 맞을까 우려해
제대로 변명도 못 하고 있다.
이 살벌한 풍경에 평소 같으면 바른말을 해야 할 사람들도 잔뜩 움츠린 채 입을 다
물고 있다. 사실인지 루머인지 알 수 없으나 시중에는 "다음은 누구 차례"
"누가 내사를 받는다더라" "누구는 기밀문서를 숨기느라 바쁘다더라"는 이야기가
확산되고 있다. 할 말 제대로 못 하고 정체 모를 '공포'에 떠는 것 자체가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더욱이 나라 밖에서는 북핵으로 인해 전쟁 이야기까지 들리고 미국과 중국과
일본은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힘으로 눌릴 뿐 아니라 평소 겪지 않던 멸시까지
당하고 있다. 아무리 비교하고 싶지 않아도 현재 우리가 겪는 상황이 병자호란을
맞기 직전의 조선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적폐가 청산
됐다고 본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옷감이 아니다. 표백제를 아무리 써도
티 없는 백색(白色)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국민도 냉정을 되찾아야겠다.
잘못을 고치는 것은 좋지만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이라는 그릇
자체가 금 가도록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선일보 오피니언중에서>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22/20171222026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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