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馬島쓰시마
맑은날 우리집 거실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아주 가까운 바다에 또렷이 보이는
대마도(쓰시마)가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고 옮겨 본 글입니다.
자료가 얼마나 신뢰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으로 보이는
섬이 대마도의 어느 부분인지도 알 수 없지만, 다만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위치 : 일본 나가사키현
면적(㎢ ) : 709.01
인구(명) : 31,786(2014년)
쓰시마는 일본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섬 전체가 쓰시마시(市)에 속한다.
시 아래 6개읍(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다.
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
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특히 대마도에는 멧돼지가 많아 에도시대에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藩使)를 두기도 하였다. 산촌에서는 숯제조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기 때문에
산림의 벌채가 심했으나 이후 조림이 이루어졌다. 바다장어·오징어·도미잡이와 전복·
소라·성게·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이즈하라 항은
대마도의 주요 어항으로 오래전부터 번성하였으며 식당, 술집 등 번화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어획고가 줄면서 상업적인 활기도 줄어들었다. 매년 8월에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열도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골군 일본 본토 정벌을 위해 대마도에 상륙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마도
를 근거지로 조선의 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폐해가 막심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퇴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였고 굶주린 왜구들에게 쌀을 제공하는
회유책과 벼슬을 하사하는 귀화정책 등의 정책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李從茂)가 200척의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 원정
(遠征)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대마도의 수비가 완강했고 복잡한 지형의 현지사정
에 어두워 실효를 거두지 하고 퇴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대마도의 지명은 고려와 조선의 영향을 받은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즈하라에 있는 시라
기야마(新羅山)와 북섬에 있는 고마야마(高麗山)이 그 예가 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
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쓰시마도주(島主)는 소 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
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선발대로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이후 대마도 번주 소우지[宗氏]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염포·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이 활발했다. 1906년 구한말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이며 그를 추모하는 비석이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져 있다. 또한 이즈하라 가네이시성(金石城) 유적지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도주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두사람의 결혼을 기념하는
이왕가종가백작어결혼봉축개념비(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쓰시마의 중심지역인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
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소 요시토시를 기리는 반
쇼인(萬松院)등이 남아 있다.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대마도를 거쳐가기 때문에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유적이 남아있으며 숙박지였던 세이산지(西山寺)가 있다. 또한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高麗門)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부근에 대마도
민속자료관과 향토사료관이 있다. 그리고 조선 초 통신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계해약조(癸亥約
條)를 체결한 이예(李藝)의 공적비가 대마도 미네초(峰町)에 소재한 엔추지(圓通寺)라는 사찰에
세워졌다. 그리고 신라국사 박제상공 순국비(新羅國使朴堤上公殉國碑)가 있다. 그는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일본에서 처형되었다. 1703년에는 위문행역관사(慰問
行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사 한천석(韓天錫)과 부사 박세양(朴世亮) 등 113명 전원이 사망하였으며 그들의 넋을 기리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한국전망대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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