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직장을 다녀 집사람이 손주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더불어 손주를 돌보게 된 외할아버지, 요즈음 말로
'할빠'입니다.
손주가 이제 43개월이니 힘든 시기는 지났지요. 그러나 정말 힘든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을 늦게 하기 시작해 고민이 많았지요.
41개월 되기까지 엄마·아빠 같은 간단한 단어 외에는 표현하지 못했
습니다.
아이의 더딘 언어발달로 고민하는 젊은 아빠·엄마들에게 제 경험을
이야기해 다소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손주가 24개월 되기까지는 언어발달 지연이 곧 해소될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하나같이 "24개월인데도 말을 제대로 못하면 장애"
라고 했습니다.
외국 부모들의 카페에 들어가도 "전문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고, 국내 대형 병원에서도 "특별한 장애는 없으나 전문 언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더욱 힘든 것은 어린이집에서도 '장애아'로 취급한 점입니다.
"전문 기관에 맡겨 치료를 받아야지, 어린이집에 다니는 건 무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곳저곳 어린이집들도 순례했습니다
언어치료와 놀이치료를 결심한 다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치료 기관의 대부분이 민간이 운영하는 곳이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
습니다. 게다가 자폐처럼 특수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도 함께 맡고
있었습니다.
어찌 됐든 비용이 덜 드는 구청이나 교회의 복지관까지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는 세월이 2년 가까이 흘러갔지요.
심적 고통은 깊어만 갔습니다.
좀 더 실질적으로 도와줄 전문가나 공기관이 있으면 좋겠는데
"언어발달 지연은 심각한 문제"라는 얘기만 더 자주 듣게 될 뿐이었
습니다.
넉 달 전입니다.
손주가 39개월 되었을 때 새 어린이집으로 갔습니다.
그곳 원장님이 우리 걱정을 덜어준 유일한 분입니다.
원장님은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곧 말문이 트일 것이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말문이 트인 아이도 있다"며
"치료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맡겨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 평안을 얻었고, 석 달 뒤 원장님 말대로 기적처럼
손주의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은 다행히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났지만,
너무 많은 부모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아기를 돌볼 시간이 적은데,
이것도 언어발달 지연으로 연결될 소지가 있습니다.
저의 경험을 토대로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선 정부와 자치단체가 '유아 언어발달 지연 상담센터'를 설치하면
좋겠습니다. 공신력 있는 상담 기관이 없다보니 비공식 루트나 단편
적인 정보에 의존하게 되면서 불필요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치료 전문 공공기관을 만들거나 자치단체 지정 협력기관을
두어 치료비를 보전해주면 어떨까 합니다.
건강보험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장애'의 일종이니까요.
마지막으로 대형 병원과 민간 치료 기관이 유착돼 과잉 치료를 유도
하는 사례를 차단할 감독 체계가 필요합니다.
부모의 조바심을 악용해 폭리를 챙기는 얄팍한 상혼을 막자는 것입니다.
부디 이 제안들이 실현돼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 젊은 부모들에게
도움 되기를 기대합니다.
- 조선일보중에서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23/20170323035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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