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락(山中樂) - 백운암에서 즐기는 시' / 원감국사(圓鑑國師)
백운암중락시(白雲庵中樂詩)
摘自摘兮養天全 적자적혜양천전
林深洞密石逕細 임심동밀석경세
松下溪兮岩下川 송하계혜암하천
春來秋去人迹絶 춘래추거인적절
紅塵一點無緣 홍진일점무연
飯一盂蔬一盤 반일우소일반
飢則食兮因則眠 기즉식혜인즉면
水一甁茶一銚 수일병차일조
渴則提來手自煎 갈즉시래수자전
一竹杖一蒲團 일죽장일포단
行亦禪兮坐亦禪 행역선혜좌역선
山中此樂眞有味 산중차락진유미
是非哀樂眞忘全 시비애락진망전
山中此樂諒無賈 산중차락량무가
不願駕鶴又腰錢 불원가학우요전
摘自摘無管束 적자적무관속
但願一生放曠終天年 단원일생방광천년
자유롭게 다니면서 천전을 온전히 기르려네.
숲 우거지고 골짜기 깊어 돌길은 좁은데
소나무 아래 시내여! 바위 아래 샘이로다.
봄 오고 가을 가도 사람 자취 끊어져
티끌 한 점 인연도 없네.
한 발우 밥과 나물 한 접시
배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자네.
물 한 병과 차 솥 하나
갈증나면 끌고 와 손수 달이고
대 지팡이 하나, 부들방석도 하나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일세.
산 속의 이 즐거움 참 맛있나니
옳고 그름과 슬픔, 즐거움 모두 잊었네.
산 중의 이 즐거움 진정 귀중하나니
학 타고 허리에 돈 차는 것도 원치 않네.
유유자적하여 속박이 없으니
일생 자유로이 살다가
천수를 다하길 바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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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국사(圓鑑國師) 1226-1293 고려시대 선승(禪僧).
수성사(修禪社) 제6세(世). 성은 위(魏)씨.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복암(宓庵).
전라남도 장흥출신.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고려 고종 13년 1226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잘 알 수 있듯이 국사의 운명은 전쟁의 와중에서
생에 대하여 깊은 고뇌를 하게끔 숙명의 굴레가 씌워졌던 것으로 본다.
17세 사마시에 합격하고 19세에 예부시에 장원으로 뽑혀 영가서기
(永嘉書記)를 지낸 적도 있었다.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
(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45세에 계족산 정혜사(定惠寺)에서 주석하였으며, 이 때 국사는 자연 그 자체가
그대로 부처의 경지임을 깨닫고, 운수 행각을 멈추게 되었다.
“부처님 소리가 바로 맑은 시냇물 소리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드날리리 (廣長自
有淸溪舌, 何必灆南更擧揚).”라고 할 하였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세수 67세 법랍 39세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가장
출처/가장 행복한 공부 카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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