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영가천도를 위한 법문

highlake(孤雲) 2022. 7. 22. 11:47

영가천도를 위한 법문 / 無比스님

 

살아있는 영가

 

부처님 말씀에는 소먹이는 목동이 도망간 소를 찾아서 절에 들어간 김에 부처님도 참배하고 법문도 들어서 부처님의 지혜를 배워가게 됐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더운 날 우리는 지장백일기도를 위해 모였습니다. 소위 선망부모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모였지만 소 찾으러 갔던 목동처럼 우리도 이 인연으로 '살아 있는 우리들 영가'를 천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영가라는 말을 수없이 하지만 아무도 영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 보면 사실은 살아있는 우리들 모두가 영가입니다. 부처님은 살아있는 우리들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서 돌아가신지 수십 년 된 영가를 천도한다는 명목을 붙이셨습니다.

 

죽은 영가를 표현하는 말 중에 '의처부목지정령(依草附木之精靈)'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자기 길을 가지 못하고 나무나 풀, 바위에 붙어서 살기 때문에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 있는 정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의지하는 영가들처럼 여기저기에 의지해서 삽니다.

 

대개 돈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오로지 돈뿐이며, 명예에 의지하는 사람을 보면 오로지 명예뿐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인생이란 없습니다. 자식이나 남편 아내에게 집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불자들은 한 걸음 벗어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처님에게 의지하고 등상불에게 의지하고 관세음보살에게 의지합니다. 이것도 의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쇠고랑을 만들어 채웠다 해도 자유가 없는 것은 똑같습니다.

 

의지하는 경계 대상에 끌려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상이 오히려 내가 됩니다. 그것이 보통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살아있는 영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되돌아 볼 줄 알고 살필 줄 아는 것이 선불교(禪佛敎)적 천도의식(遷度儀式)입니다.

 

영가이야기를 시작 하면서 ‘법당에 이름 써서 붙여놓은 종이가 영가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라는 말씀으로 ‘살아있는 영가’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내 영가의 천도가 지금 시급하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득한 조상 영가 천도가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효도

 

일찍이 부처님은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부모를 공양하고 세상 관례대로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의 효도입니다.

둘째는 살아서 부모의 뜻을 따라주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이름을 빛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좋은 효도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무얼 하자고 하든지 부모의 뜻을 따라주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체면 세워 달라고 부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체면을 세운다는 것은 더구나 말이 안 됩니다. 누가 무슨 행동을 했을 때 ‘뉘집 자식인가’라는 말을 듣는 것은 이미 돌아가신 부모라 해도 그 부모에게 욕이 되는 일이고 반면에 ‘누구집 자식인지 훌륭하다’라는 말을 듣는 것은 돌아가신 지 수 십 년이 지난 부모에게도 그 명예를 바치는 일입니다.

셋째로 가장 훌륭한 효도는 살아있을 때 부모를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라도 생과 사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그 생과 사의 이치에 맞도록 영가를 천도해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효도입니다.

 

효도의 세 가지를 이야기 했는데 살아있는 영가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바른 이치에 따라 사는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사는가 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의송지갈(依松之葛)은 직용천심(直聳千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칡넝쿨이 소나무를 의지하면 소나무 높이만치 올라갑니다. 그렇지 못하면 땅을 기거나 1미터도 올라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존재의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보는 가르침을 선택해서 공부하고 신앙심을 갖는다면 내 영혼, 내 자신의 정신세계가 소나무에 의지한 칡넝쿨처럼 높이높이 올라갑니다.

 

지금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쫓아다니는 그 무엇은 과연 내게 소나무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지 내 정신세계를 여름날 식물처럼 무럭무럭 크게 하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80을 사셨으니까 당시 나이로는 상당히 오래 사신 셈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리불이니 목건련이니 형님뻘 되는 훌륭한 제자들의 죽음을 다 목격하셨습니다. 부처님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그 큰제자들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던 후배 제자들이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사셨으니 사람이 죽는 것과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법문이 바로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

자주법주(自洲 法洲)

 

내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의지하라, 그리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내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라, 그리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내 자신을 편히 쉴 곳으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편히 쉴 곳으로 삼아라, 그리고 다른 것으로써 편히 쉴 곳으로 삼지 말라

‘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 당신이 열반에 든다고 선포 하셨을 때 부처님의 나이를 생각하고 언젠가는 열반하시리라 예상을 했던 제자들도 막상 성인이 오늘 저녁에 돌아가신다고 하니 장례준비도 못하고 통곡을 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가 안 죽는 사람이 있느냐? 그거 크게 슬퍼하지 말라. 내가 너희들에게 줄 것은 이미 다 주었다.”

그때에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우리가 최후로 의지해야 할 것은 진정한 나입니다.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진정한 나와 진리의 가르침 오직 두 가지만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최후의 말씀이고 우리들 최후의 보루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영가 천도 법문입니다.

누구를 천도하든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자귀의 법귀의입니다.

내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내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는 것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부처님

 

살아있는 영가를 천도하겠다고 한 입장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장경을 번역하고 강의도 하고 감수한 책도 냈지만 벽에다 글자로 써 붙인 영가를 잘 모릅니다. 경전대로 이야기 했을 뿐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 사실, 말하는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는 여러분들 그 모습, 이렇게 더운 날 더운 줄을 아는 그 존재 이것입니다.

 

이것은 무량대복입니다. 여러분들의 신통묘용이 기가 막힙니다. 이 실체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 선불교적인 천도이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석굴암 부처님은 전세계 예술가들이 와서 탄복을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입니다. 탄복을 하려면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여러분에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살아있는 부처입니다. 이제 어느새 살아있는 영가가 살아있는 부처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임을 눈 떠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의 최고 안목인 바로 이 종지, 지금 이 존재에 대해 눈을 뜨면 여러분들의 선망부모 천대만대 부모까지 다 눈을 뜹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자자손손들도 다 진리의 눈을 뜨게 됩니다.

굳이 없는 돈을 들여서 천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을 뜨는 이 자리에서 모두가 천도되는 것입니다.

 

흠소십마(欠少什麽)오? 부족한 게 도대체 무엇이냐?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차가우면 차가운 줄 알고 아프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내 자리 자꾸 침범하면 화낼 줄 알고 가까운 친구 죽었다 하면 통곡하고 슬퍼할 줄 알고 이 기기묘묘한 존재가 부족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또 달리 이것 밖에 무엇이 있는가?

 

부처님의 원력과 인연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렵다는 말은 우리가 익히 들어왔습니다.

 

부처님은 왕자의 몸으로 태어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피나는 고행을 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소중한 까닭에 80 노구로 열반에 이르시기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뜨거운 인도의 햇빛을 무릅쓰고 다니시며 중생교화를 하셨습니다.

 

사람 사람이 모두 완전한 부처라는 이 이치를 깨우쳐서 인생에 바로 눈뜨고 의미 있고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라는 그 소원 하나로써 부처님은 그렇게 전법의 길을 다니셨습니다.

 

경전에 보면 내일이면 죽을 사형수가 형무소의 똥통 속으로 수 미터를 헤엄쳐서 자기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나는 나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배가 파선되자 함께 탔던 죽은 친구의 송장을 타고서라도 헤엄쳐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법을 전했노라고 했습니다.

 

소 찾으러 절에 갔다가 법회에 참석했지만, 조상 영가 천도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부처님의 지독한 어찌 보면 무섭기까지 한 절박한 원력으로 이 순간 이 자리가 마련되었고 우리가 이렇게 동참을 했습니다. 이 인연은 가볍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절에 다니신지 여러 해 되고, 부처님 은혜도 알게 모르게 많이 입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연 닿는 대로 또 인연이 안 닿으면 지어서라도 열심히 이웃 사람들에게 친구와 친척들에게 이 진리의 가르침을 안내해야 합니다.

 

부모를 진리의 길로 안내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효도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한 번 더 생각을 돌려서 마음을 가다듬고, 열반의 순간까지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등명 법등명, 신통묘용한 여러분 자신이야 말로 살아있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인연 부처님의 법력은 어디를 가나 환희롭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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