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변소간의 비밀 - 박규리
십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 번도 똥을 푼 적 없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 거라는 둥
아예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둥 말도 많았습니다.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 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
하여간
그 곳은 이상하게 냄새도 안 나고
볼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는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훤한걸 보면요
분명 뭔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찾았는지도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
요 한 줌 사랑이든
향기 잃은 증오든
한 가지만
오래도록 품고 가슴 썩은 것들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속에 맺힌 서러움 제 몸으로 걸러서,
세상에 거름 되는 법 알게 되는 것이어서요.
십 년 넘게
남몰래
풀과 나무와 바람과 어우러진
늙은 변소의 장엄한 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도 하지만요.
밤마다
변소가 참말로 오줌누고
똥 누다가 방귀까지 뀐다고
어린 스님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구미호 같은 보살말고는,
그 누가 또 짐작이나 하겠어요.
출처: 마음이 쉬는 뜨락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박 눈/목필균 (0) | 2020.01.11 |
---|---|
기다리는 사람에게/안도현 (0) | 2020.01.05 |
별 뜻 있겠습니까 /원태연 (0) | 2019.12.19 |
내가 나를 어루만져 준다/안은영 (0) | 2019.12.18 |
내 인생의 스승은 시간이었다/김정한 (0) | 2019.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