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모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highlake(孤雲) 2019. 3. 29. 11:49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곱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Giovanni Marradi - Together Again - Together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락(苦樂)/김소월  (0) 2019.04.05
서로 가슴을 주라 / 칼릴 지브란  (0) 2019.04.04
춘분/노천명  (0) 2019.03.26
봄 편지/이해인  (0) 2019.03.21
장닭이 어떻게 울어/김복수  (0) 2019.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