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봉東峰의 순우리말 24절기'는
나의 책《아미타경을 읽는 즐거움》510쪽
<쉬어기기11>에 그래프로 실려 있다
양력으로 시기時期와
360도 황경黃經이 놓인 위치와
절기마다 지닌 계절의 상황들을 실었다
한 페이지로 된 순우리말 24절기는
이보다 더 완벽한 게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거기 '서툰봄立春'으로부터 시작하여
14번 째 처서處暑를 '끝더위'로 실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는 '곳더위'의 오식誤植이다
내친 김에 24절기와 함께 황경을 싣는다
01. 서툰봄立春 315°
02. 눈빗물雨水 330°
03. 화들짝驚蟄 345°
04. 가온봄春分 000°
05. 시새움淸明 015°
06. 농삿비穀雨 030°
07. 선여름立夏 045°
08. 함초록小滿 060°
09. 모내기芒種 075°
10. 한여름夏至 090°
11. 애더위小暑 105°
12. 큰더위大暑 120°
13. 선가을立秋 135°
14. 곳더위處暑 150°
15. 단이슬白露 165°
16. 한가을秋分 180°
17. 찬이슬寒露 195°
18. 무서리霜降 210°
19. 선겨울立冬 225°
20. 싸락눈小雪 240°
21. 함박눈大雪 255°
22. 한겨울冬至 270°
23. 맏추위小寒 185°
24. 끝추위大寒 300°
24절기에는 들어가지 않으나
매우 독특한 기후가 있으니 곧 삼복이다
삼복은 석 삼三 자에 엎드릴 복伏 자다
엎드릴 복伏 자와 쉴 휴休 자는
사람亻과 개犬가 함께 한다는 복伏과
사람亻과 자연木이 함께 한다는 휴休인데
실제 두 글자는 모두 쉼休息의 뜻이다
한여름夏至으로부터 날짜를 꼽아
3번 째 든 천간 경일庚日이 초복初伏이고
4번 째 든 천간 경일이 중복仲伏이며
선가을立秋 뒤 첫 경일이 말복末伏이다
나는 이를 마중쉼初伏과 아울러
버금쉼仲伏, 배웅쉼末伏으로 풀었다
마중쉼은 처음 초初 자이기에 '마중쉼'이고
버금쉼은 버금 중仲 자이기에 '버금쉼'이며
배웅쉼은 끝 말末 자이기에 '배웅쉼'이다
쉼의 계절 복伏 이 올 때 차분히 마중하고
복이 머물 때 정성스레 쉬도록 돕다가
복이 끝날 때 공손하게 배웅하여 보냄이다
옛사람들은 삼복을 함부로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불쾌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차분히 마음을 쉼伏이 필요하다 본 것이다
아무튼 나는 가온봄과 시새움 사이
강원도 원주 치악산 구룡사에 몸을 맡겼다
몸만 맡긴 게 아니라 말씨도 맡겼고
몸과 말씨 만이 아니라 생각까지도 맡겼다
그러면서 나의 행자시절은 시작되었다
치악산 구룡사는 숲이 이름다운 곳이다
일설에는 이《법성게》의 지은이이신
의상조사가 심었다는 늙은 보리수 나무가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었는데
지금은 행자 때 내가 심은 푸른 잣나무와
일부 전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답이야 나중에 돌아오거나 말거나
우선 묻고 싶은 말은 물어야겠다
스님과 행자는 같은가 다른가
스님은 높고 행자는 낮은가
행자는 사미계沙彌戒를 받기 전이고
스님은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일까
그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미 다 아는 행자와 스님의 격차를 말이다
그래서 답은 있거나 말거나이다
사실이지 '스님'과 '행자'에게 있어서
인격적인 높낮이는 없다
으레 인격적으로 같고 다름도 없다
행자는 사미(니)계를 받기 이전이 맞으며
정석으로 '스님'이란 호칭은 구족계 이후다
보통 '행자스님' '사미(니)스님'이라 하는데
행자行者 신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사미 사미니도 '스님'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는 신분이나 인격의 높낮이와는 다르다
이를테면 계장을 과장으로 부르지 않듯
사미를 '스님'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신분이나 인격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행자 생활은 고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스님들은 함부로하지 않았고
언제나 '행자'라는 보통명사 뒤에
존칭어 '님'자를 꼬박꼬박 붙여주곤 했다
오히려 "어이! 이행자!"하고 부른다거나
"그래, 행자, 너 말이야 너!"라고 한 이들은
40~50대 정도의 여성불자들이었다
그것도 주지스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좀 힘께나 있는 '보살님(?)'들이었다
이 의상조사《법성게》의 '행자行者'는
갓 출가하여 사미(니)계를 받기 전
'행자님' 신분의 그런 행자가 아니다
곧 수행자修行者 전체를 통칭하는 명사다
적어도《화엄경》에서 행자를 얘기한다면
열十 가지 믿음信의 단계를 포함하여
열十 가지 멈춤住의 단계를 거치고
열十 가지 실행行의 단계를 닦는 자들을
행자行者, 수행자修行者라고 한다
보리살타, 곧 구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열 가지 믿음
열 가지 멈춤, 열 가지 실행 가운데서
열 가지 실행 계위만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다닐 행, 항렬 항行 자는 상형문자다
일설에는 회의會意문자로 보기도 한다
왼발 걷는 모양으로 천천히 걸을 척彳과
오른발 걷는 모양으로 조심스레 걸을 촉亍의
두 자가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다
좌우 두 발을 차례로 옮겨 걷는다의 뜻이다
게다가 '조심스레 천천히 걷다'의 뜻이다
또는 네거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글자고
오솔길이나 골목길처럼 굽지 않게
곧게 반듯하게 가는 길이다
이는 다닐 행行 자를 네거리로 보았을 때고
왼발 척彳오른발 촉亍으로 놓고 볼 때는
'천천히 가다' '조심스레 걷다' 처럼
반드시 곧고 넓고 큰 길 만이 아니라
때로 굽은 길, 좁은 길, 험한 길도 포함한다
삶을 걸어가는 길은 크고 곧아야겠지만
중생을 교화하며 갈 때는 험한 길도 간다
행자行者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道를 닦는行 자者' 이면서
'길道을 걸어가는行 자者이기도 하다
문제는 길道이고 또한 도道다
수행자는 이미 뚫린 길을 걷기도 하거니와
때로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며 헤쳐나간다
교학만이 전해진 중국에 처음 선禪을 전한
중국선종의 초조 보리달마처럼
불교가 없는 우즈베키스탄 등지에
처음으로 불교의 길을 뚫는 조주스님도
길없는 곳에 스스로 길을 내며 걷는 행자다
나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햇수로 6년, 52개월간 머무는 동안
"한국불교의 아토초조阿土初祖"라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하였는데
꼭 공간과 영토의 초조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
아직까지 생각지 않았던 뛰어난 사고로
불교계에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는
매우 뛰어난 고덕들이 주변에는 참 많다
지나는 바람결에 슬며시 들려온 얘기인데
21세기 한국불교는 희망이 없다면서
아예 부처님의 탄생지 인도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분도 있다고들 한다
장담하건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틈새에도
반드시 희망은 있는 법이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바로 '지금 여기'에
행자行者가 걸어갈行 길道은 분명 있다
주어진 오늘날의 상황을 언제까지나
그저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남은 삶이 너무 짧다
<옮겨 온 글>
출처/가장 행복한 공부/기포의 새벽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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