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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경제발전

highlake(孤雲) 2026. 3. 1. 13:00

박정희와 경제발전

박정희는 무엇으로 세계적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을까?

(담당 비서관의 비사를 중심으로....쓰다 보니 긴글이 되었습니다

 내용이 재미 있으니까  끝까지 읽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세계적 영웅 박정희 일국의 장기 집권자가 독재자냐 또는 영웅이냐 하는 판단은 사후에 무엇을 남겼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세계 제2차대전 후에 나타난 카다피, 무바라크, 후세인, 마르코스 카스트로등 인물이 조국에 남긴거라곤 나라의 혼란 굴욕 빈곤 또는 패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명실 공히 악덕 독재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봅시다. 1910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을 거쳐 박정희가 등장한 1961년 까지의 50년간이 한반도에 나라가 생긴이래 제일 굴욕적이고 못사는 기간이었고, 박정희의 등장시부터 현재까지의 50년의 기간이 가장 잘 살고 영광스러운 기간이 아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현대 100년사의 중간에 우뚝서 있습니다.

 

그가 가장 못사는 나라를 가장 잘사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리하여 세계적인 영웅으로 칭송받고도 남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가요. 여기에 대답은 과학기술입니다. 박정희 장군은 1961년 5월16일 새벽 군사혁명을 일으켜 성공하자 말자 국가재건회의 의장이 되어 혁명내각을 발족시켰습니다.

 

그의 혁명공약에 따라 조국 근대화와 민촉 중흥을 위한 제1보로서 내각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작성 할것을 지시했습니다. 정부는 최고회의의 심의를 거쳐 61년 말에 작업을 완료하고 62년 1월5일에 발표를 하면서 1월 13일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시켰습니다.

 

2.혁명초기(61-62년)의 한국 해방후 16-17년이 지난 60년대 초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고 한반도의 역사상에서도 제일 못사는 기간의 절정기였습니다.

이때 한국은 UN에 등록된 국가로서는 1인당 GNP상 103위였으며 지금의 아프리카 짐바브웨 보다 가난하였습니다. 이때 한국의 GNP는 숫자상으로 82달러였습니다. 말레이시아가 281달러 필리핀이 268 댤러였으며 북한이 우리보다 세배나 부자였습니다. 전세계에서 희망이 없는 국가로 낙인 찍혔습니다. 1955년에 미국에서 ICA 윈조자금으로 비료공장을 지어 줄때 한국은 공업은 할 능력이 없고 농업밖에 할수 없으므로 농업에 필요한 비료공장을 지어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충주비료는 한국이 건국된 이래 건설된 최대의 화학공장이므로 비료의 공급 뿐만아니라, 기술인력 양성에 크게 기여토록 활용 하였습니다. 혁명정부 1호사업으 국영으로 총외화 소요자금 1천6백만불의 정유공장건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착수금 3백 만불을 지불하고 나니 정부 외화보유불이 바닥났습니다.

이걸 전부 합작투자와 차관사업으로 바꾸어 자금을 조달하어 건설했습니다. 이때 정부에는 돈 한푼 없었습니다.

 

국가 안보면에 있어서 이승만 정부는 힘도 없으면서 북진 통일한다고 외치기만 하다가 오히려 남침을 당했습니다. 60년대 초에도 안보면에서 자체 방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과 국방을 동시에 할 수없다고 판단하고, 국시로서 안보정책을 선건설 후국방으로 바꾸고 국방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업적인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에 맡겼습니다.

 

이 두가지만 보더라도 두분이 얼마나 위대한 대통령이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6.25동란때 패배 일보직전에 UN군의 참전을 이끌어 적화통일을 면하게 하였으며, 세계 1등국인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었습니다.

 

박정희는 북쪽의 준동대처에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개발에만 전념하여 경제대국을 만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3.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의 철학 이승만 정부에서 5개년계회이란게 있었고 민주당 정부에서 Taska 3개년 계획이란게 있었지만 외국에 용역을 줘서 만드는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경제개발이란 말만 있었지 실천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혁명정부는 이것을 외국에 맡겨서 할 시간이 없으니 우리 손으로 자쳬적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지로 5개년 계획이 필요한 부처는 공장건설 계획이었으므로 상공부(산자부)였습니다. 모든것이 처음 하는 일이라 어떻게 할줄 몰랐습니다. 필자가 상공부 재직 당시 화학공업 분야는 필자가 만들었습니다. (사본 필자보관)

 

고 오원철수석(당시화학과장)이 박충훈 차관을 모시고 최고회의에 가서 약 1시간 가량 브리핑 했습니다.

의장을 비롯한 참석자 모두가 오과장의 명료하고 자신있는 브리핑에 놀랬습니다. 기술자요?(기술자임을 짐작하고) 브리핑 명수구먼! 브리핑이 끝났습니다.

 

이때 부터 브리핑 명수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후 국보적 존재가 되어 "오국보"라고 불리었습니다)

 

브리핑한 경제개발 내용은 공업입국 수출제일주의로 농업이 아닌 공업입국에 이론을 제기하는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공업화에 시작하는 마당이라 1차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는걸 위주로 하였으며 정유 비료등 기간산업공장은 원료에서 부터 추진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습니다.

 

후진국인 한국은 공업화를 함에 있어서 있어야 할 천연자원 기술 생산시설 넓은 시장 자금등 아무것도 없었으며 있는거라고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용감하게 착수 했습니다. 원료 기계시설 제조공정 운전기술 자금등 모두를 해외에 의존 했습니다.

 

한국의 산업은 따라서 처음부터 글로발 되어 국제경쟁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세계 시장시장에서 가장 값싸고 좋은걸 도입에서 경쟁력있는 제품을 생산해서 국내에 쓰고 남는거는 수출했습니다. 규모가 큰 공장을 지어야 염가의 생산을 할수 있으니까 수출할수 있었습니다.

 

수출제일주의에 의하여 수출해야 되는 의무를 달성할수 있었습니다. 국제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가장 선진된 공업구조를 구축할려고 노력 했습니다.

 

이모두가 과학기술자의 역할이었습니다. 일본의 한교수는 한국이 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글로발화 함에 있다고 하면서 가장 최신의 제조공정 (PROCESS)선정에 있다고 하면서 이걸 "후발의 유리성"이라고 했습니다 .

 

또한 어떤 평론가는 기술인력 양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걸 부정하는 사람 아무도 없으나 필자는 공업화계획 자체가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기술중시 철학과 과학기술자를 중용한데서 생겨 난것이 라고 생각합나다.

 

이리하여 70년대 박정희의 산업정책은 과학기술자의 머리와 손에서 만들어지고 이것이 현장에서 실물로 나타 났습니다 .

 

4.박정희가 손수 만든 방위산업 1970년을 전후하여 북한의 대소 침공사건이 도를 더해갔습니다.

예를 들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뒤인 1월 23일 미국의 정보함 프에블로 납치. 삼척 울진에의 1개중대상륙 시도사건등이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새로 당선된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아시아 각국의 방어는 1차적으로 각국 자신이 져야된다는 소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2개사단중 7사단의 1개사단을 한국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철수시켰습니다.

 북쪽에서 침공해 올시 미국은 관여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의 방어는 우리가 책임져야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70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우리가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방위산업을 육성해야 된다.고 주창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박정희는 EPB (경제기획원)를 방문한 자리에서 1년의 시간을 줄테니 방위산업육성계획을 작성 보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국방부나 상공부 또는과기처에 지시치 않고 EPB에 지시한 것은 방산육성이 어렵고 방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경제에 총책임을 지고 있는 강력한 부처에 맡긴 것입니다.

 

EPB는 실세였던 기획차관보가 책임자가 되어 국력을 총동원하여 만들었습니다. 국가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

대통령이 급해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71년 11월 EPB는 보고에서

1.종합기계공장

2.특수강공장

3.주물선 공장

4.조선소를 포함한 소위 4대핵공장을 지어 육성하겠다는 것으로

5개년계획으로 1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마음에 들리가 없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마자 말씀도없이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김정렴실장이 동승을 했습니다. 대불만의 표시로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회의에 당시 상공부 광공전 차관보이던 오원철이 참관 하고 김정렴실장에게 전화로 육성방안을 보고했습니다.

요지는 모든 병기는 부품의 결합체이므로 부품공장만 지으면 되며 당장착수 할수있고, 1/100mm 연구개발읕 위하여 ADD를 강화 재편성만 됩니다.하고 보고 드렸습니다. 실장은 즉시 각하께 보고 드려야 하니 보고서를 써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필자가 우연히 같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필자가 보고서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오수석은 청와대 실장실에가서 실장과 같이 기다리고 계셨던 각하께 보고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싫다 좋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실장과 오수석은 실장실에서 기다렸습니다. 30 분이 지나도 전화가 없었으므로 퇴청할려고 일어서는 찰라에 각하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오원철 광공차관보를 "경제 2수석으로 임명해" 하는 명령이 내렸습니다.

 

한국의 방위산업이 태동하는 순간입니다. 과학기술에 조예가 깊은 박정희의 모습을 보여 준것입니다. 박정희는 4대핵공장이 아니고 부품 조립으로 방위산업 육성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방위산업육성에 착수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음양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첫째로 현재 미제 병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품질을 알수 없는 국산병기는 사용할수 없다. 재경측은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과학기술 업계는 아직 빠르다는 것이 었었습니다. 박정희는 대통령인 내가 직접 한다는 한 마디로 무마시켜 한국식 육성계획으로 방위산업을 육성시켰습니다. 기술자가 아니면 이런 아이디어를 낼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대통령의 과학기술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의 방위는 한국이 책임지라고 해놓고 한국이 한다고 하니까 반대했습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대에 대하여 무장이 되어 있지 않은 250 만의 향토예비군에 기본병기를 공급하는거라고 해! 이것으로 반대를 무마 시켰습니다.

 

미국은 미국병기를 생산하는데에도 제작도면을 주지않아서, 우리는 제품을 가지고 제작도면을 만드는 역설계를 했습니다. 방위산업의 제일 어려운 점은 수요추정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시때는 수요가 무한대요 평시때는 제로라는것입니다. 방산공장은 기본적으로 30%를 군수품, 70%를 민수품을 생산하는 걸로 하여 수요에 따라 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평시니까 우리는 같은시설로 100%평시제품을 생산하고 있지만, 북한은 평시제품을 못하니까 100% 운휴상태입니다. 이것도 기술자가 만들어 낸 한국형 방위산업 육성계획의 하나입니다.

 

 

5.중화학공업화 정책

박정희 대통령을 정말로 21세기에 한국이 나은 세계적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어 준것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입니다.

70년대의 경제정책 만으로는 후진국에서 한단계 올라가서 개발도상국가 되었을 뿐입니다. 선진국 건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중화학공업은 공업구조를 고도화시켜서 80년대초에 1인당 GNP 1000불과 100억불의 수출 목표를 달성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선언형식으로 발진되었습니다.

 

경제정책이 대통령선언으로 공포된것은 중화학이 처음입니다. 이것은 국가최고 정책으로 취급하여 추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운을 걸고 추진 한다는것이었습니다. 1972년 말 한국의 경제 지표가 수출16.7억 달라 GNP가 318달라였으니까. 얼마나 대담한 목표인지 알수 있습니다.

 

경제개발계획 작성의 책임부서인 EPB는 71년도에 72년도 부터 시작하는 3.4차의 신장기 경제개발이라는 명칭으로 81년도의 수출목표를 53억불로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장미빛 전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100억불 달성을 위한 중화학 정책이 대통령에 의하여 선언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경당국이 무모하다 시기상조다 실현성이 없다는것이었습니다. 방산육성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자신이 추진하는^친정 친관^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반대의 선봉장에 섰던 남덕우 재무는 대통령 자신이 설득하기로 하였으며

관계 장관에 대하는 청와대에서 각의가 있을때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하여 오수석이 브리핑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 부동한 이상 이것으로 내각의 반대가 없어지고 협조하는 태세가 갗추어 졌습니다.

 

이렇게 개혁적인 정책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배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발표시까지 1급비밀로 취급한것은 공론화했다가는 반대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추진도 못할것 같아서 였습니다.

추진 이유는 첫째로 60년대 단순가공의 노동집약 산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왔고 70년대라는 황금기를 맞아 경제 대도약이 있어야 되겠다는 이유 뿐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의 결심을 얻게 된 결정적인 사항은 일본이 50년대에 중화화학을 추진하여 성공한 실례가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대규모 투지가 필요하다는 우려에 대하여는 총액100억불 소요에 대하여 연평균 10 억불 소요가 되므로 우려사항이 아님을 보고드리며 경제1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박정희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중화학정책은 100억달라고 목표이고 공업구조개편이 수단이라는것을 믿고 깅력한 추진체를 구성하여 추진시켰습니다. 따라서 중화학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지도자의 강한 의지와 국민 총화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외국인과 인터뷰에서는 중회학 추진을 위하여는 Strong leader 와 Stable govrernment가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6.과학기술이 산업발전을 좌우한다 .

산업발전이 있는곳에 과학기술이 있고 과학기술이 있는 곳에 산업발전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박정희대통령은 중화학선언시 전국민의 과학화 선언을 하였습니다. 과학기술은 연구소 건설로 부터 출발 시켰습니다. 미국의 존슨대통령이 한국의 월남파병의 대가로 공과대학을 짓는데 협조하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의 했습니다.

 

박대통령은 아니요! 종합연구소를 짓고싶소 해서 60년대 말에 지금의 KIST가 설립되었고, KIST를 중심으로 몇개의 다른 연구소가 입주하여 홍능 과학 제일1단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산업발전과 더불어 연구수요가 폭주하여 대전대덕에 세계일류의 과학단지를 만들었습니다.

중화학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정부대로 민갼은 민긴대로 많은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

지방마다 과학볠트가 생겨나서 연구소 건설의 붐을 이루어서 공업이 세계 5위의 국가를 만들었다면 과학은 과학한국이라고 부를 만큼 세계적인 과학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과학기술을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도 하고 신제품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만들어서 지금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선두주자가 되어 달리고 있습니다. 현재의 AI나 IT 기술뿐만 아니고, 거북선. 8만대장경. 금속인쇄술등 세계에 자랑하는 과학유산등을 가진 우수한 민족입니다.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은 세계 일류급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없이는 산업발전이 있을 수없습니다. 과학기술 발전은 연구소의 과학기술자의 힘에서 나옵니다 .연구풍토를 조성하여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존중하고 과학기술자를 중용하고 후대하여야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없는 곳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2020.7.15 김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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